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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손차박 대전] 독일 분데스리가 전설 갈색 폭격기 '차붐' 차범근 이야기
    스포츠 2023. 8. 23. 2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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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오늘 이야기할 주제는 요즘 떠오르는 키워드 손차박 대전에 대해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한국을 전설 3명을 두고 누가 한국 최고의 선수였는가에 대해 많은 축구팬들의 의견이 분분하게 나오고 있는데요 박지성 손흥민 선수는 지금 생중계 문화가 많이 발달되고 직접 볼 수 도 있는 환경이어서 두 선수의 플레이를 볼 수 어디서든 접해 볼 수 있었는데요 그의 비해 TV가 귀했던 시절 해외축구 무대에서 활약했던 선수여서 객관적인 비교가 어렵지만 그 당시 유럽에서 뛰던 게 생소하고 차별이 엄청 심했던 시절 그것을 극복하고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갈색 폭격기라 불리며 '차붐'이라는 이름을 유럽축구에 알리면서 동시에 그의 플레이는 독일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차범근은 유럽진출 1세대로서 선수생활 이후에도 차범근 축구교실을 만들어서 장학금을 매년 주고 유학도 시키면서 유소년 축구 발전과 한국 축구 발전에 크게 기여했고 박지성, 손흥민 선수 같은 최고의 선수들이 나올 수 있게 만들어준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인터뷰하는 차범근

    차범근의 축구인생

    차범근은  경기 화성시 평범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서 시골 소년으로서 논밭일을 도와주면서 성장했습니다 다양한 운동을 어렸을 때 접했었는데 타고난 스포츠 맨이었던 차범근은 축구, 핸드볼, 육상 그리고 씨름까지 스포츠 종목을 가리지 않고 했습니다. 여러 운동을 하면서 자신이 운동에 재능이 있다는 걸 발견하게 되고 아버지가 농사짓던 땅을 팔고 서울 영등포로 이사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차범근은 축구부가 있는 영도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는데 운이 나쁘게도 영도중학교 축구부가 얼마가지 않아 해체를 하게 되었고 필드하키부로 들어가게 됩니다. 하지만 경신중학교 장운수 감독 발굴을 해서 다시 축구에 하게 되었는데 선배들의 구타로 가출을 하기도 했었지만 다시 축구에 집중을 했습니다. 고등학생이 되자 여러 대학교에서 러브콜을 보냈고 연세대학교와 경희대학교에서 차범근을 데려가기 위해서 기싸움을 펼쳤었는데 이를 뿌리치고 예상과는 다르게 고려대학교에 진학을 하고 이때부터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고 본인의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성인대표팀에 최연소로 뽑히게 되었고 태국에서 열린 아시안컵 이라크와의 조별경기에 만 19살이던 차범근이 데뷔전을 치렀는데 

    이때 승부차기에서 4대 2로 패배를 했는데 이때 차범근이 실축을 했고 이후로 차범근은 충격으로 인해 패널티킥을 차지 않게 됩니다. 이후 대표팀에서 좋은 성적을 보여줬고 이후 신탁은행이라는 실업팀에 입단을 하였고 팀이 서울은행과 합병되면서 신탁은행은 해체되었고 존경하던 감독이 있던 자동차보험 축구팀으로 이적을 하려 했고 하지만 서울은행이 차범근이 이적을 하면 팀을 해체한다고 축구협회를 압박했고 그 결과 두 팀에게 차범근 소유권을 포기하라고 했고 차범근은 결국 군입대를 선택했습니다. 전력이 약했던 공군에 입단을 했는데 이때 공군이 타군 보다 5개월 전역이 늦었는데 공군에 입대를 하면 의가사 전역을 통해 8개월 일찍 전역시켜 준다는 조건으로 입대를 했습니다. 이때 국가대표도 병행을 했었는데 일본에서 열린 기린컵에서 뮌헨글라드바흐와의 경기에서 상대 감독이 독일에서도 통할 것 같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해서 이후 이적을 했습니다. 

    차범근 통산 득점 출처:spotv

    갈색폭격기 차붐의 시작

     

    전역이 한 달여 남은 시점에서 차범근은 특별 휴가를 냈고 78년에 독일로 향하게 됐고 다름슈타트와 계약을 하게 되었습니다. 꼴지 팀이었던 다름슈타트에서 데뷔전을 치렀는데 2골을 어시스트하며 첫 경기부터 인정을 받았고 곧바로 여권 갱신을 위해서 한국으로 돌아왔는데 국부유출 논란과 함께 군인 신분인데 어떻게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뛰냐며 논란이 일어났고 결국 공항 기자회견에서 군대에 끌려가게 됐습니다.

    다름슈타트는 하루 만에 선수를 잃게 되었고 독일 축구계에서는 차범근을 빨리 돌려보내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묵살되었고 차범근은 다름슈타트 소속으로 되어있어서 국내에서도 뛸 수 없게 됐습니다. 이후 반년이란 시간을 군대에서 더 보내야 했습니다. 독일에서 가능성을 봤던 차범근은 오히려 군대에 있는 동안 설레었다고 합니다. 79년에 다시 독일로 진출을 했고 프랑크푸르트에 진출을 합니다. 키커지 부분 외국인 부분 1등을 기록했습니다. 데뷔시즌에 31경기에서 12골을 터트렸고 프랑크푸르트의 최다 득점선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uefa컵까지 활약하면서 강팀들을 꺾고 우승컵까지 들어 올렸고 키커지에서 선정한 best11에 뽑히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 시즌에서 부상을 당하고 23경기 8골에 아쉽게 시즌을 마쳤습니다. 하지만 포칼컵에서 6경기6골을 넣으며 우승컵을 들어 올렸습니다. 이후 다시 기량을 회복해서 81-82  시즌 11골로 두 자리 득점을 달성했고 82-83시즌에는 15골을 넣으며 리그 득점 공동10위까지 올랐습니다. 차범근은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트르에서 주간 mvp5회 주간 베스트 11에 19회선정이 되었고 모든 시즌 랑리스테 등급을 받았습니다. 차범근은 스트라이커인데도 불구하고 빠른 주력과 돌파로 좌우를 가리지 않고 활동을해서 전술적 능력을 높게 평가받았습니다. 이런 활약을 인정받아서 당시 1년에 1억 3000 만원 상당의 연봉을 받았고 한 달에 1100만원 상당을 받았습니다. 당시에는 독일 리그 3위에 해당하는 수준이었고 여기에 보너스까지 더해 다리 보험금 5000만원을 포함에 개인과 구단이 든 보험이 10억이 넘어갔습니다. 인기 역시 최고조에 달했습니다. 이후 레버쿠젠으로 이적한 차범근은 평균 평점이 공격수 분데스리가 공격수들 중 3위를 기록하면서 레버쿠젠에서도 대체불가한 선수임을 증명해 냈습니다.

     

    레버쿠젠에 입단한 손흥민

    유소년 육성에 참여하다

    차범근은 독일 분데스리가 시절 축구의 기본기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몸소 체험하면서 기자들과 인터뷰를 할 때 은퇴 후 한국 축구에 기여를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발언을 했었고. 우리나라 축구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유소년 육성 시스템에 대해서 강조했었는데 은퇴 후 최초의 유소년 클럽인 차범근 축구교실을 설립하면서 유소년 지원에 힘써왔습니다. 차범근의 축구교실은 다른 종목의 유소년 클럽 탄생에도 영향을 주면서 좋은 선례를 남겼습니다. 일본에서 우연히 아이들이 잔디에서 축구를 하는 것을 보게 되었고 일본은 30년을 내다보고 축구선수를 키운다는 말을 들었고 이를 실천했습니다 그리고 매년 최고의 유망주를 선정을 해서 '차범근 축구상'을 제정해서 이동국, 박지성, 기성용 등 수많은 축구 꿈나무를 발굴해 내는데 기여를 했습니다. 

     

    결론적으로 

    차범근은 유럽축구 선수의 선구자였고 이와 동시에 유소년 육성에도 힘을 쓰면서 한국축구의 다방면으로 기여를 한 인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기록이상의 가치가 있는 선구자이자 유소년 육성에 힘을 쓴 인물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렇게 해외축구에서 보고 배운 것을 그냥 넘어가지 않고 한국에 적용시키려 했던 것이 지금의 한국축구를 만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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